독일 ‘하르츠 개혁’은 경제민주화라는 미신을 깬 것 - 이병태
1987년 미국 엔지니어링 아카데미는 34개 분야 첨단 기술 중 25개 분야에서 일본이 미국을 앞서고 있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일본 기업들은 미국·유럽이 지배하던 하이테크 영토를 거침없이 장악해 갔다.
그 후로 30여 년. 지금 일본은 소비와 투자·고용 침체가 장기화하는 ‘디플레이션 경제’로 역사상 유례없는 선진 경제의 실패 사례로 꼽힌다. 잃어버린 30년 ‘헤이세이 불황’으로 민간 분야 투자 부진이 이어졌고, 1990년대 일본 경제는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갔다. 조선업, 메모리 반도체, LCD 산업이 차례로 무너졌고, ‘신성장 산업’으로 기대했던 태양광 패널은 중국, 내비게이션 등 소프트웨어 산업은 미국에 굴복했다. 요즘 일본에서 혁신이라고 회자되는 분야가 고령화·저출산 등으로 파괴되는 사회적 관계를 대신해주는 ‘섹스돌’이나 경조사에 동원되는 ‘가짜 하객’과 가족 임대 사업 등이란 처량한 현실은 일본 경제가 서 있는 자리를 잘 나타낸다.
소득 후퇴와 고용 질 저하
일본은 실질 임금에서 1997~2017년 사이 13% 뒷걸음질쳤다. 이 기간 다른 선진 국가들은 10~39% 성장했다. 한국과 비교해도 명암은 갈린다. 한국이 평균 연봉에서 1997년 대비 2017년 45% 상승한 반면, 일본은 1.6% 오르는 데 그쳤다. 고용 시장도 악화 일로다. 일본 시간제 근로자 비율은 1980년 11.1%에서 2019년 25.2%로 급증했다. 평생 고용과 탄탄한 기업 복지는 모두 옛말, 일본 청년들은 모두 절망에 몸부림치는 ‘초식동물’로 변한 지 오래다.
일본 경제의 추락에 대해 폴 크루그먼 뉴욕시립대 교수는 통화정책의 실패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불황에도 금리를 더 이상 내리지 못하는 유동성 함정에 빠졌다는 것이다. 리처드 구 노무라경제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부동산 버블이 붕괴되면서 기업 재무제표가 급속하게 부실에 빠졌고, 결과적으로 정부의 통화·금융 확대 정책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빚을 갚는 데 급급하면서 불황이 장기화했다고 진단했다.
아베노믹스는 중앙은행을 통한 대규모 양적 완화, 적극적인 재정 정책, 일본 경제 재점화를 위한 구조조정이란 ‘3개의 화살’을 통해 이런 디플레이션 경제 탈출을 약속했다. 엔화 평가 절하로 주가가 상승하고 아베노믹스가 잠시 효과를 보이는 듯 보였지만 이런 해법은 단기적 경기 부양에 그칠 뿐 장기적 문제 해결에는 제한적이라 일본 경제는 다시 마이너스 성장과 디플레이션으로 회귀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구조조정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노렸던 세 번째 화살은 제대로 발사조차 못하고 있다. 후미오 하야시 도쿄대 교수와 에드워드 프레스콧 애리조나주립대 교수(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는 일본 디플레이션 경제 원인을 통화·재정정책이 아니라 낮은 생산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는데 이들 분석이 맞았던 셈이다. 일본 시간당 노동생산성은 OECD 국가 최하위권이고 이는 일본이 경쟁과 경제적 자유를 통한 혁신보다는 약자 보호라는 ‘좀비 경제’에 가깝다는 증거다.
‘일본화’ 눈앞에 온 한국
다카토시 이토 컬럼비아대 교수가 개념화한 ‘일본화 지수(Japanization Index)’는 실질성장률과 잠재성장률 차이, 물가지수, 명목 정책금리 합이 0 이하로 떨어지면 경제의 일본화가 진행되었다고 판단한다. 이 분석의 틀로 한국이 얼마나 일본화가 진행되고 있는지를 판단하면 2000~2008년까지는 6~10으로 선방하고 있었지만 2019년 0.78로 일본식 디플레이션 경제가 코앞에 다가와 있음을 가리킨다. 코로나 사태가 아니었어도 한국은 암울한 미래를 피할 수 없었던 셈이다.
우리 경제는 5년마다 잠재성장률이 1%씩 낮아지는 패턴이 30년 이상 지속되고 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의 좀비화와 생산성 향상을 막는 과도한 규제와 정부 비대화가 급속하게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악조건에서 기업을 옥죄는 공정거래 3법, 집단 소송제도, 징벌적 배상 제도 등 규제 정책들이 물밀듯이 추진되고 있다. 사법부 노조 편향 법률 해석도 심각하다.
규제가 지배 구조 개선한다는 건 미신
기업을 규모별로 차등 규제한다고 기업 행동과 지배 구조가 개선된다는 건 미신일 뿐이다. 대기업은 규제의 비용을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작은 기업들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규모에 따른 규제는 경제만 침체시키고 역설적으로 대기업 점유율을 높이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대규모 징벌적 배상제도나 집단 소송이 벌어지면 어떤 기업이 망할지는 자명하다. 기업의 역사는 기업이 지배 구조에 관한 규제에도 불구하고 실질적 지배 구조 변경은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다. 일본에선 재벌을 해체하니 재벌 지배하에 있던 기업들은 지주인 은행을 중심으로 계열사를 형성하고 상호출자로 경영권 보호를 했다. 캐나다와 이탈리아, 독일 등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났다. 결국 기업들은 규제에 대항해 자본과 인력을 낭비했을 뿐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던 것이다.
‘경제민주화’는 이미 독일에서 폐기한 개념
‘경제민주화’는 독일 같은 후발 산업국가가 영미식 자유시장경제로는 추월하지 못한다면서 창안한 ‘조직 자본주의(Organized Capitalism)’를 정치적으로 수사화한 개념이다. 그러나 독일은 이미 이에 따른 부작용을 깨닫고 1990년대 노동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하르츠 개혁’을 통해 조직 자본주의를 폐기했다. 더구나 독일처럼 성숙된 시민 사회나 합리적 규제의 틀도 갖추지 못한 우리가 그 개발의 역사나 문화적 차이를 도외시한 채 번듯한 외양만 수입해 무리하게 적용하는 건 파국을 예고하는 길일 뿐이다.
한국이 본격적으로 일본화되면 어떻게 될까. 일본은 그나마 공동체적 신뢰와 성숙한 시민 사회가 받치고 있다. 회사는 망해도 좋다는 노조나 해직 노동자를 무조건 재고용하라는 정치적 압력, 비정규직 제로화를 선언하는 이념적 대통령도 없다. 국민은 높은 인내심으로 공동체에 순응하고, 안정된 정부와 관료 사회가 지탱한다. 전쟁 위협이 없고 미국과 강력한 동맹과 기축통화를 갖춘 나라다. 해외 자산은 여전히 높은 수익을 내고, 내수 시장이 크며 중국 의존도도 우리와 비교해서 월등히 적다.
아베의 퇴장을 보면서 진정한 경제구조 개혁이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는 요즘이다. 일본이 어려웠다면 우리는 천만 배 더 어려울 것이다. 5년 단기 성과주의에 국가 지속 가능성을 팽개친 저질 정치,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시민 사회는 한국이 디플레이션 경제로 본격 진입하면 일본이 아니라 그 반대인 그리스, 이탈리아, 아르헨티나와 같은 끊임없는 사회 갈등과 인기 영합과 정치 불안정이 반복되는 나라가 될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병태 (KAIST 교수 / 컨슈머워치 공동대표)
조선일보 2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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